짙푸른 잔디공원

늦잠을 잤다. 시차적응의 빈틈을 타서 아침형 인간이 되어보겠다는 야심은 김빠진 맥주마냥 미지근해져버린지 오래다. 한국에서처럼 9시가 넘어야 슬슬 눈이 떠지는 걸 보니, 시차적응이 끝났나보다. 임시 거처의 내 방은 창이 서쪽에 나 있고 그나마 앞건물에 가려서, 아침 햇살이 들지 않는다. 아침에는 햇살을 받으며 깨는게 좋다. 나중에 방을 구하면 햇살 잘드는 동향을 얻으리라 생각해본다.

찌뿌둥한 몸으로 기지개를 펴고, 마지못해 이불 밖으로 나왔다. 간단히 토스트에 우유와 씨리얼로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무얼 먼저할까 잠시 고민했다. 오늘은 한가한 나날 중에 나름 할 일 많은 날이다. 커튼을 살짝 걷어보니 날씨가 꽤나 좋다. 처음 밴쿠버에 왔을 때는 맨날 비오고 어두컴컴하드니 떠날 때가 되니까 날씨 좋은 날이 이어지고 있다.

다운타운에 가기전에 조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곳 기온은 아직 낮은 편이지만, 햇살이 따사로워서 반팔만 입고 나가도 괜찮은 느낌이다. 잘 때 입던 추리닝과 반팔티셔츠를 입은채 씻지도 않고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사는 동네가 좀 구석진 동네인데, 기름진 까치집 얹은 머리 그대로 이렇게 나가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 이 동네 사람들은 평소에도 늘 이러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평소에는 그들을 보며 참 꾀죄죄하게 다닌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막상 이러고 나가기엔 참 맘편하다.

집 근처 언덕 길을 약 3분정도 뛰어 올라가면 동네 공원이 있다. 작은 축구장하나 있는 퍼블릭 공원인데, 그 허름한 공원에도 잔디가 잘도 깔려있다. 사실 깔려있다기보다 그냥 방치된거 같은데, 잔디는 참 짙푸르다. 잔디구장에서 두어바퀴 뛴다. 한 때는 100M를 12초 플래쉬에 뛰던 나였지만, 그건 이제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허튼 소리가 되어버렸다. 두바퀴 뛰었는데 숨이 찬다. 어릴 때는 숨차게 뛰고나면 아랫배 옆구리쪽이 아팠는데, 이젠 심장 고동이 거셀 뿐이다. 무리하면 운동도 독이라는 말을 핑계삼아 그만 뛴다.

놀이터에 앉아서 숨을 고르는데, 공기 참 맑다 싶었다. 가슴 깊숙히 들이쉬는 공기는 상쾌하고, 시원한 바람도 내 땀을 식히고 (땀을 식히는건지 식은 땀을 흘린건지 모르겠지만) 강렬한 햇살은 내 피부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그만큼 주름도 깊어지겠지만 말이다. 공기가 맑아서인지 햇살이 매우 강렬한데, 다행히 눈아래 깔린 짙푸른 잔디가 그 눈부심을 줄여준다. 저 짙은 녹색의 잔디는 보고만 있어도 숨과 마음이 고르게 되는거 같다.


대여 핸드폰 반납

이 곳에 와서 핸드폰을 빌렸다. 한달간 빌린 비용은 통신요금까지 합쳐서 약 8만원 정도. 집을 알아볼 때 빼고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미국에서는 프리페이드폰을 30불정도에 사서 몇백분까지 쓸 수 있다던데, 여기는 그런게 없는걸까? 그래도 렌탈폰 이용해서 덕분에 마음에 드는 방을 얻어 생활했으니, 그 비용에 포함된거라고 애써 합리화해본다. 딱 한달 빌린거고, 오늘이 그 반납 일. 이것 때문에 다운타운까지 나갈 생각을 하니 귀찮다싶다. 또 다른 일거리를 찾아봐야지. 그래 우체국도 들리고, 출금도 하자.


불필요한 짐 보내기

여기서 사서 읽은 책 한권과 가져왔던 쓸데 없는 책을 비롯해, 필요없는 짐들을 서울의 집에 보내기로 했다. 내가 가져온 짐은 최소한의 옷가지와 노트북, 카메라등 전체 무게가 17Kg정도이다. 세계여행자치고 최소한의 무게라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참 무겁다. 일본에서 최군을 통해 몇가지 짐을 돌려보냈지만, 더 줄이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배낭여행객들 보면 내 두배쯤 되어보이는 가방을 맨 여자들도 잘 돌아다니던데 놀라울 뿐이다. 난 이것도 무거워서 쩔쩔매고 있는데 말이다.

여기서 산 책 한권은,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UBC)서점에 갔다가, 아웃라이어와 함께 베스트셀러에 올라가 있는 책이었는데, 작고 가볍고 가격도 싼데다 영어 연수생으로써 영어공부도 좀 하려고 샀던 것이다. 철학을 유머와 함께 쉽게 설명한 책인데, 영어 유머가 내게 쉬울리 없다. 절반 넘게 읽었으나, 웃은 부분은 많지 않다. 그래도 종교 섹션에 있던 agnostic(불가지론) 하나는 건졌다. 내 종교적 관점이 딱 그거인거 같다, 불가지론.

야심차게 들고왔으나 결국 쓸데 없게 된 책은, 스패인어 입문 서적. 결국 아르헨티나에서의 스패니쉬 연수와 탱고 입문은 접기로 했다. 여행을 떠나와서야 이런저런 가치판단 기준과 원칙들을 정했는데, 아르헨티나 일정도 가지쳐지게 되었다. 덕분에 이 책은 필요 없어졌다.

린디 연습화 한켤레도 보냈다. 집으로 보낼까 그냥 버릴까 고민했지만, 어차피 보내는 비용에 5천원 안팎으로 추가될거 같아서 보낼 물건들의 충격흡수재역할도 시킬겸 보냈다. 세계여행을 떠나오면서 댄스화를 두켤레나 가져온 나는 뭐니?

이제껏 모은 일본에서의 티켓이라든지, 결국 나중에는 꺼내보지도 않을 기념품들도 함께 넣었다. 밴쿠버 중앙 우체국에 가서 소포상자를 사서 다 챙겨넣고, 가장 싼 방법으로 보냈다. 1.8Kg이었는데 20불(23000원)정도였고, 5~6주 걸린댄다. 머 적어도 나 도착하기전에는 도착하겠지. 그럼 내 짐 이제 15Kg정도로 줄은건가? 휴~


캐나다 마지막 출금

국제 현금 카드라는게 있다. 시티은행의 그것이 제일 유명한거 같고, 다른 은행들도 다 나름의 카드를 발급해준다. 나는 주거래 은행인 국민은행에서도 하나 발급받아서 둘다 가져왔다. 둘 다 수수료도 저렴하고 현지ATM에서 현지통화로 바로 출금할 수 있어서 참 편하다. 캐나다에서는 시티은행을 아직 못봤음에도, 이곳의 은행들과 나름의 제휴가 되어있는건지, 거의 수수료없이 출금되는거 같다. 이런 편리한 것이 있다니 놀랍다.

다행히 출국한 뒤로 환율이 조금 안정세에 접어들어서 조금씩 숨통이 틔이고 있다. 출국전에 환전한 환율에 비하면 아주 행복한 환율인 셈.

오늘 출금이 아마 캐나다에서는 마지막일게다. 남은 여정에 필요한 금액에 20불의 여유를 더해 환전했다.
 

여행예산 정리

여행 예산과 실제 지출내역을 별도의 스프레드시트 파일로 관리 중이다. 원래 가계부를 Numbers로 관리하고 있었는데, 이번 여행만을 위해 따로 파일을 만들었지. 구글 닥스로 관리할까 하다가, 네트워크가 안되는 곳이 많을테니, 로컬에서 관리하기로 했다. 다행히 아직까지의 지출은 예산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10%씩만 초과돼도 전체 금액기준으로 보면 꽤 큰 금액이라서 잘 관리해야겠다 싶다. 지출 내역을 일일히 적으려다가 관두었다. 일본에서 모든 금액을 다 적었더니, 그 관리하는 시간이 더 걸리는듯 하다. 환전내역과 카드 지출과 남은 잔액만 관리하기로 했다. 결국 사용한 총액임에는 차이가 없고, 은행계좌나 카드 지출 내역으로 기록이 되어있으니 확인하기 편하다.




대충 계산해보면, 한국에서의 지출보다 2.6배정도의 금액을 소비하고있다. 한국에서보다 2.6배 즐거운 생활을 하면 되는거지 뭐.  이왕 내 멋대로인거 3배 즐겁게 생활하자.


밴쿠버 생활의 끝자락

이번 여행 프로젝트에서 가장 긴 일정인 밴쿠버 여정도 거의 끝나가고 있다. 내일 시작하는 록키산맥 투어를 다녀오면 2박3일이 남은 셈. 밴쿠버에 왔던 이유와 목표가 뭐였더라. 아쉬움을 남겼던 어학연수를 마저하고, 아이폰 개발도 하며 쉬는 것이었던거 같다. 이 나이에 일반 ESL학원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쉽게 이해가지 않는다. 전화통화중 어머님 말씀이, "그래, 영어는 좀 늘었냐?", 내가 대답하길, "나 영어 원래 잘하잖아"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래 그래'라고 답해주실만도 한데, 어머님 반응은 늘 그렇듯 아주 이성적이고 시니컬하다. "췟, 행여나 그러시겠소"라고 말씀하시는군. 하하하, 보통 친아들은 과장해서 자랑하고 그러는 거 아닌가? 아무튼, 이렇게 어머니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는 영어실력을 유지한채 영어학원 수강은 끝이났다.

학원 생활은 참 재미도 없고, 별로 유익하지도 않았으나, 이제 전혀 어학연수에 대한 미련이 없으니, 원하던 목표는 달성했다 하겠다. 모든 것은 때가 있고, 단 한번의 기회만 있는 것 같다. 두번째가 되면 처음의 설레임이나 긴장감도, 또 그 만큼의 즐거움이나 경험치도 없어지는듯 하다.

또 하나의 목표였던 아이폰 개발은, 아쉽게도 전혀 성과가 없다. 나름 이번 휴식기간중 나에게 스트레스가 되었던 부분이었다. 사실 우습다, 여행중에 아이폰 개발이라니, 그리고 누구도 나에게 기대하지 않으며 시키지도 않는 일이다. 내가 하지 않기로 하면 그만인 부분인거지. 그러고보면 그 모든 스트레스가 내 안에서 나오는거 같기도하다. 간단히, 하지말지 뭐 하고 마음먹어버리니, 여행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좀 아쉽긴해...


평범한 하루

밴쿠버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Vancouver Public Library. 자유 열람대에서 내 노트북으로 인터넷도 쓸 수 있어서 좋다. 도서관에 대한 얘기는 기회가 되면 따로 적기로 해야겠다.

이 것이, 평범치 않은 여정중에, 평범한 하루의 일이다. 내일 아침 록키 투어 일정에 늦지 않으려면, 일찍 귀가해서 밥해먹고 설겆이도 끝내고 일찍 잠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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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BT 비티 2009.04.28 05:29 신고

    확실히 '집'이라는 포스트가 있는 형태의 여행과 그렇지 않은, 님과 같은 형태의 완전 자유방임형 여행은 생각보다 더 많은 차이가 있는 듯 합니다. 저는 달라스에 사는 동생집을 포스트로 해서 짧게는 4~5일, 길게는 5주정도씩 '외유'를 하는 방식이라 그만큼 편하게 여행하고 있습니다. 대신 어드벤처는 조금 떨어지는 듯... 소소한 일상이지만, 정말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 addr | edit/del hatemogi 2009.04.28 15:27 신고

      잠시라도 거처가 있으면, 짐도 좀 줄이고, 움직이기도 편하고, 나름 든든하기도 하고 좋드라구요. 이제 미국에 내려가면 거처없이 계속 방랑해야하는데, 살짝 걱정이 앞섭니다. 조금 하다보면 적응 되겠거니, 낙관적으로 생각중이에요.

  2. addr | edit/del | reply donny 2009.05.02 21:13

    지금은 어디쯤일까?
    요새 갑자기 인플루엔자A가 유행이라 살짝 걱정이 되는군 다음 행선지가 남미잖아 ^^;
    암턴 몸 조심해

    • addr | edit/del hatemogi 2009.05.03 05:24 신고

      그러게, 이래저래 늘 걸림돌들이 많아. 여기는 라스베가스인데, 아직은 조용한듯. 별탈없이 여정이 진행되야할텐데...